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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역사

고려 거란 전쟁 3차 침공과 귀주대첩 다시보기

by 카페인 뱀파이어 2024.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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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거란 전쟁 3막 - 거란의 3차 침공과 귀주대첩

고려의 이순신 양규장군의 대활약으로 거란의 2차 침공이 막을 내리고, 나주까지 피난을 간 현종이 개경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초등학교 역사 시험에서조차 서희의 담판과 강감찬 장군 문제만 출제된다고 하는데요, 이번 기회에 양규 장군이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16화 양규의 마지막 사투

 

본론으로 돌어가서 쑥대밭이 된 개경을 다시 재건하는데 힘쓰던 도중, 현종은 요나라의 황제 야율융서에게 약속을 지키라는 서신을 받게 됩니다

바로 거란에 직접 방문을해서 고려가 거란에 신하임을 인정을 하라고 말이죠

하지만 황폐해진 국토를 재건하는도중 현종은 마음이 착잡해졌는지 아프다는 핑계로 계속 약속을 지키지 않게 됩니다

이에 야율융서는 화가나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친조를 안 할 거면 강동 6주를 다시 돌려달라는 요구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현종은 거부하게 됩니다

2차 여요전쟁이 끝나지 얼마 되지도 않은 채, 한반도에 다시 전운이 감싸게 되는데요, 결국 요나라 황제 야율융서는 강동6주를 다시 탈환하기 위해 전쟁이 끝난 지 8년 채 되지 않아 고려를 재차 침공하게 됩니다

 

거란의 명장 소배압과 피실군

1018년 12월 거란의 명장 소배압이 10만의 정예군을 이끌고 내려오는데요, 참고로 소배압이라는 인물은 서희와 담판을 지은 소손녕의 친형이라고 합니다

소배압은 송나라와 전쟁 중에 뛰어난 활약을 많이 하여 중국 쪽에서는 이미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거란 3차 침공의 병력수는 약 10만 명으로 거란 1차 침공 80만과 2차 침공 40만 규모에 비해 10만 명밖에 안 되는 병사긴 하지만, 이 10만 명의 정예부대는 '피실군'이라 하여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군대라는 의미로 요나라 황제의 최정예 친위부대라고 합니다

반면 이에 대항하는 고려는 20만의 대군이었고, 이를 거닐을 사령관으로 임명된 사람은 문무를 겸비한 노장 강감찬 장군이라고 합니다

드라마를 보시면 알겠지만, 당시 전쟁터로 나선 강감찬장군은 무려 70세로 현종도 처음에는 위험하다며 만류하였지만, 계속 고집을 부리며 전쟁터로 보내달라 간청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평소에 워낙 청렴하신 분이라 출세를 늦게 하게 되어 집사람에게 맨날 구박을 받고 살았는데, 그 바가지 스트레스를 거란군에게 풀었다는 썰이 있다고 합니다;;

 

귀주대첩 전개양상

구주대첩 수공작전 출처:KBS

1. 강감찬의 수공작전

거란군이 3차 전쟁에서 주요 목표는 위에 말했듯이 당연하게도 강동 6주였습니다

강동 6주 중에서 위치상으로 흥화진이 가장 중요했기에, 강감찬 장군은 이를 간파하고 적을 한 번에 쓸어버릴 파격적인 전술을 준비하게 되는데요, 먼저 흥화진에 고려의 주력부대를 배치하여 흥화진 동쪽 삼교천에 군사들을 매복시킵니다

그리고 삼교천 상류에 굵은 밧줄로 소가죽 꿰어 댐처럼 강물을 막고 매복하였다가, 거란군이 강물을 건널 때 막았던 이 물을 일시에 터트려서 대열에 허리를 끊고,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향해 매복한 병사들을 돌격시켜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수공작전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2. 살수대첩의 재현, 역사상 가장 완벽했던 현종의 개경 청야작전

 

강감찬 장군에 수공작전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란은 후퇴하지 않고 개경으로 나아가는데요, 주로 기병으로 구성된 거란군은 흥화진에 고려군을 따돌리며 개경으로 매우 빠르게 나아갔다고 합니다

소배압은 속전속결로 현종을 사로잡으며 전쟁을 끝낼 속셈이었나 싶습니다

하지만 몇 차례에 거란과 전쟁을 치르며 거란을 파악하게 된 현종은 청야전술을 펼치며 결국 개경을 지키는 데 성공하는데요, 바로 현종이 펼친 청야전술이 성 밖에 백성들과 식량을 성안으로 모두 거두어들임으로써 기동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보급품없이 약탈을 하며 싸우던 거란의 '타초곡기'에 매우 치명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와중에 우리는 현종이 2차 전쟁 때 남쪽으로 피난을 같던 상황과 대조해 봤을 때, 현종이 얼마나 이 전쟁을 사생결단의 각오로 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당시 고려군 20만은 서북면에 집중되어 있는 상태라, 정작 수도였던 개성이 비어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안에서 농성을 펼치는 현종의 패기와 보급품이 떨어져 점점 지쳐가던 거란군은 시간이 지날수록 흥화진에서 쫓아오는 강감찬 장군으로 인해 궁지에 몰리게 되었는데요.

결국 소배압은 포위될 수도 있는 이 위급한 상황에서 후퇴를 결정합니다

추격해 오던 강감찬은 거란군이 개경에서 철수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재빨리 거란군을 궤멸시킨 작전을 구상하게 됩니다

 

고려 거란 전쟁의 끝 한국의 3대 대첩, 구주대첩

귀주평야회전 1019년 2월

 

아군이 추격하여 석천을 건너 반열에 이르니 시신이 들을 덮고 사로잡은 사람, 말과 낙타, 갑옷, 무기를 헤어릴 수 없었다

-고려사 강감찬 열전

 

1019년 2월 1일 드디어 귀주성 앞 평원에서 5만명가량 줄어든 거란군과 10만 대군의 고려군은 두 진영다 배수의 진을 친 채 양측 20만의 육박하는 대군이 뒤엉켜 싸우기 시작합니다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은 팽팽한 접전이었지만, 결국 김종현의 정예 기병대가 도착하여 승기는 고려군으로 곧 기울게 되고, 전의를 상실한 거란군은 갑옷과 병기구를 내 팽긴채 마구 도망을 가기 시작합니다

결국 최정예 10만여 가량 되었던 사령관 소배압과 요나라 피실군은 수천의 병사만 남은 채 간신히 살아 돌아갔다고 합니다

거란의 역사서 <요사>에는 이처럼 처절했던 패배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척박한 땅에 유목민이었던 거란족은 전쟁하나로 세계 최강대국 '요나라' 왕조를 건국한 강인한 민족이었습니다

거란족은 개국이래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렀지만, 여태껏 이토록 참혹한 패배를 경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고려에 트라우마가 잔뜩 생겼는데, 거란황제 야율융서는 "이제는 볼일을 보더라도 고려 쪽으로는 보지도 말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거란의 1차 침공 서희의 담판으로 시작하여, 개경을 함락하긴 했지만, 결국 소득 없이 회군한 2차 전쟁으로 이어져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으로 막을 내린 장장 26년 동안 총 세 차례에 거란의 침공으로 걸쳐진 '고려 거란 전쟁'은 한국역사 중 3대 대첩 중 하나인 귀주대첩으로 인하여 고려가 크게 승리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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